1권: 테이머들
1.
푸른 어둠이 세상을 가린 시간이었다. 오래된 전봇대 불빛에 의지하여 길을 걷던 여자가 있었다. 짧은 단발을 하고 노출이 극히 적은 청바지와 긴팔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여자는 오른 어깨에 맨 가방을 만지작 거리며 불안함을 달랬다. 마음 속은 겁에 질렸지만 얼굴에선 티나지 않게 무표정한 상태로 걸었다. 그림자가 세개로 쪼개지던 때 뒤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여자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걸음을 점점 빨리 걸었다. 그럼에도 뒤에선 뭔가가 오는 기척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문득 정신을 차린 여자는 자신이 큰 시내로 왔음을 자각했다. 수많은 도시의 불빛이 어둠을 수놓았다. 조금 안심한 순간이었다. 걸음은 느려지고 있었다. 누군가 쫓아오는 듯한 느낌을 그녀는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경찰서 앞에 도달했다. 왠지 안심이 된 그녀는 문득 뒤를 돌아봤다. 사람들은 무심하게 그녀의 옆을 지나쳐갔다. 잠시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뱉은 그녀가 다시 앞을 바라봤을 때였다.
“아악!”
온통 검은 눈동자의 복슬한 털을 가진 괴물이 그녀를 노려봤다. 침을 질질 흘리며 맹수의 이빨을 그러낸 그것이 울부짖었다. 주위에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여자는 온 몸을 떨며 뒷걸음질치다가 넘어졌다. 그와 동시에 괴물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녀의 옷을 찢어버렸다. 단순히 피부에 스친정도였지만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여자는 고통을 느낄새도 없이 두려움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데이터…… 인간…… 데이터……”
괴물은 자신이 할퀸 여자의 피가 묻은 손톱을 핥았다.
“데이터…… 인간…… 먹는다…..”
푸른 털을 가진 괴물의 몸이 피로 적셔졌다. 그녀의 목을 깨물고 비틀자 여자는 맥없이 정신을 잃었다.
“캬오오오!”
여자의 몸이 가루가 되어갔다. 그리고 괴물에게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의 몸이 점점 커졌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그 괴물의 모습도 사라져갔다. 어두운 길 한복판에 유난히 밝은 경찰서가 눈에 밟혔다. 그 앞에 남은 것은 한 여성의 옷가지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것들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다. TV는 사람들의 행방불명을 이야기했고 시민들의 불안감을 조장했으나 그 어느것도 괴물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대도시의 사람들이 실종되는 일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경찰은 순찰을 늘리겠다고 발표했으나 그 어느것도 효력을 보지 못하는 상태라고 합니다. 일각에서는 불법체류자의 짓이라는 거짓 정보마저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실종자는 달마다 증가하고 있으며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화면은 전환되어 경찰 제복을 입은 사람에게로 바뀌었다. 카메라 플래쉬가 그를 향해 쉼없이 비춰졌다.
[현재는 그 어느것도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금전요구도 없었고, 목격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로인해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점을 다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면이 돌아왔다. 기자는 목청좋게 경찰의 안일함을 고발했고 TV는 다른 가십거리를 찾았다. 어두컴컴한 저녁에 시작된 뉴스가 끝을 맞이할 때 전자기기에 이상한 전류가 흘렀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순히 기계 오작동이라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그 전류는 골목의 전구를 향했다. 옅은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고 검은 구멍과 함께 0과 1의 숫자로 구성된 형체가 나타났다. 점점 형체를 갖춘 그것은 야생의 눈을 한 뭔가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푸른 털, 긴 뿔, 둔해보이는 몸통은 평범한 동물과는 완벽히 달라보였다. 입에서 푸른 불길을 토헤낸 그것이 뭔가의 기척을 느끼자 거대한 발톱이 그것을 찢어버렸다. 노란 몸통을 가진 괴물이었다. 그리고 어깨에 양 갈래에 롤 머리를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그것을 괴물은 자신의 몸에 집어넣었다. “호호홋. 이번엔 제대로 된 녀석이야.”
2.
주위가 번쩍였다. 스산한 밤에 떨어진 번개는 주위의 이목을 끌었다. 귀를 찢을듯한 소음이 지나가고 남은 전기가 허공에 흩어져 사라졌다. 깊고 넓은 산이라 주위에 인기척이 없었다. 조금씩 낡았지만 마법사를 생각나게 하는 푸른 망토와 모자, 거기에 어울리는 금빛의 머리칼, 전신을 감춘 의상은 사람이 아닌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입으로 알 수 없는 단어를 중얼거리자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것이 그것의 몸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금빛 머리를 한 누군가가 푸른 옷을 입은 자에게 다가갔다.
“이번에도 다크바이러스?”
물음을 던진 소년의 말에 푸른 옷의 그것은 고개를 끄덕였다. 달빛이 두 존재를 내리쬐었다. 소년의 파란 눈이 돋보였다. 남에게 위압감을 주는 큰 키였지만 가는 손목과 허리는 보호본능을 일으킬 정도로 대조적이었다. 하얀 피부와 금빛 머리카락, 이목구비가 뚜렷한 외모는 굉장히 이국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웃음기가 전혀 없는 얼굴을 가졌다.
“괜찮아. 흡수할 수 있으니까.”
푸른 망토의 무언가는 입으로 어떠한 말들을 속삭였다. 그러자 검은색으로 흩어졌던 가루들이 푸르게 빛나며 그것의 몸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든 일이 끝났을 무렵이었다.
“가자 위자몬.”
키 큰 소년이 말한 언어. 푸른 망토의 그것은 위자몬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리고 위자몬이 답했다.
“그래. 영철아.”
위자몬이 손을 뻗자 거대한 폭음이 숲을 에워쌌다. 둘은 재빠르게 그곳을 돌아봤다. 위자몬은 영철 앞에 서서 나무 지팡이를 곧게 뻗었다. 영철은 손에 있는 기계로 눈을 돌렸다. 그것은 산의 지도였다. 그리고 푸른 점으로 보이는 뭔가가 둘 앞에 있었다.
“나와!”
푸른 점은 하나가 아니었다. 모습을 드러낸 건 강아지 형태에 금빛의 목걸이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온 몸에 상처가 난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영철과 같이 똑같은 기계를 들고 있었다. 색이 달랐지만 형태는 완벽히 똑같았다. 영철의 기계는 재빨리 강아지 형태를 한 뭔가를 향해 기계를 가리켰다.
“플롯트몬, 성장기, 필살기는 플롯트의 외침. 포유류형. 우습네 겨우 성장기?”
살짝 비웃음을 흘린 영철에게 플롯트몬 뒤의 남자아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 넌 뭔데 그렇게 자신만만하냐? 테이머들 좀 잡고 다녀서 재미좀 봤나본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플롯트몬은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를 내보냈다. 고음역대의 음성은 날카로운 바람을 만들어냈고 나무와 바위에 금이가게 만들었다. 위자몬은 가볍게 방어막을 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아. 이런…”
남자아이는 온 몸에 힘이 풀렸다. 위자몬의 설명을 기계로 보자 의욕을 상실했다.
“습격하기 전에 디지바이스로 한번 보는게 어떠냐?”
영철이 비아냥거렸다. 남자아이는 플롯트몬을 안고 뒤돌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감사히 받도록 하지. 플롯트몬, 그리고 테이머의 데이터.”
위자몬이 낮게 깔린 저음으로 말했다. 그러자 푸른 빛이 지팡이에 모이기 시작하며 불꽃이 타는 소리를 냈다. 천둥의 울음소리가 산을 울렸다. 위자몬의 한마디가 시작됐다.
“썬더 클라우드.”
하늘이 번쩍였다. 그리고 귀를 찢을듯한 굉음이 사방에 흩날렸다. 위자몬은 긴장감을 지닌 채 앞으로 갔다.
“그 여자야.”
영철의 말에 위자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플롯트몬과 그 테이머는 벌써 도망을 간 듯 했다. 영철이 디지바이스를 확인했다. 쫓아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방해물이 있었다. 또 하나의 불빛이 플롯트몬의 테이머와 자신들 사이에 있었다. 둘 앞에 거대한 아구몬이 나타났다. 영철은 노골적으로 기분나쁘다는 얼굴을 지었다.
“호호홋. 사람들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그 여자라는 것은 아구몬의 어깨에 타고 있던 노란색의 양갈래 롤빵머리를 한 여자아이를 말한하는 것이었다. 여자아이 웃으며 아구몬의 어깨에 내려 그 앞에 섰다.
“시비는 저쪽이야.”
“뭐. 그렇겠지. 근데 너도 똑같았잖아. 호호홋.”
“으. 그 웃음소리.”
영철의 불평스러운 말투에도 소녀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는 소녀의 자신만만하고 비꼬는 듯한 웃음이 혐오스러웠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싫은 것이 있었다.
“맞아. 현미야. 난 네 생각이 얼굴만큼이나 이쁘다고 생각해.”
저 아구몬의 말투였다. 도저히 디지몬으로서 보이지 않는 저 닭살돋는 말들은 위자몬도 고개를 저었다.
“같은 디지몬이지만 참.”
위자몬은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 영철과 위자몬은 현미와 아구몬이 자기의 앞을 비킬거 같진 않았다. 원래 그런 녀석들이었고 거기에 대해 둘은 귀찮았다. 다크바이러스라고 불리는 것에 감염된 디지몬들이 늘어나고 디지몬들을 흡수해야만 영양섭취를 하는 디지몬들은 다크바이러스를 어떻게 처리하지 못했다. 당연히 진화는 불가능했다. 다크바이러스에 감염된 디지몬을 흡수하는 순간 그 디지몬은 서서히 죽어갔다. 그렇게 테이머로서 디지몬이 없는 자들은 디지바이스가 사라져 더 이상 테이머라고 부를 수 없게됐다. 그런걸 극도로 두려워하는 이들은 결국 다른 테이머들의 디지몬에 손을 뻗었다. 방금 플롯트몬의 테이머도 똑같은 부류였다. 그리고 이 상황을 위자몬은 이렇게 불렀다.
“테이머 전쟁.”
모두의 이목이 위자몬에게로 향했다.
“현미. 네가 어떤 마음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난 영철이를 혼자 두게 하지 않을 거야. 만약 다른 테이머가 우릴 건든다면 난 철저하게 짓밟을거야. 디지몬도 그리고 그 테이머도…”
위자몬은 지팡이를 바로 들었다. 태양 무늬를 가진 지팡이 끝에 전류가 조금씩 모여 틱틱 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구몬은 현미의 뒤에서 공격태세를 취했다. 영철이 말했다.
“나랑 위자몬은 우리 방식대로 할 거야.”
곧 위자몬이 말을 이었다.
“현미, 아구몬. 난 성숙기야. 영철이의 능력이로 난 빠르게 진화했어. 우린 아무도 건들지 않아. 하지만 우릴 건든다면 너희들도 가만두지 않겠다.”
둘의 말에 현미는 웃음지으며 말했다.
“호호홋. 아이고 무서워라. 그 말 기억해둘게. 그런데 너희들도 기억해둬. 테이머와 그 디지몬을 죽이려고 한다면 우리도 가만있지 않을거야. 가자, 아구몬.”
아구몬은 현미를 어깨에 태웠다. 곧 빠르게 하늘 위로 점프해서 사라졌다. 위자몬은 그 모습을 보고 필살기를 풀었다. 영철이 한숨을 쉬었다.
“저 아구몬. 평범한 성장기가 아니야.”
위자몬도 고개를 끄덕였다. 플롯트몬의 테이머는 산에서 내려왔다. 디지바이스에서 야생 디지몬의 출현을 감지했다. 그리고 다크바이러스에 감염된 디지몬이란 걸 알자 그것을 무시했다. 그 때였다. 주위를 온통 붉게 물들인 섬광이 비추어졌다. 디지바이스에 반응이 왔다.
“이거. 신참인데?”
플롯트몬을 내려주었다. 곧이어 다른 테이머도 이 신호를 본 건지 자신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플롯트몬, 먼저 차지하자.”
소년과 플롯트몬은 다크바이러스에 감염된 야생 디지몬이 빠르게 도심에 숨어든 것을 알았지만 깨끗하게 무시한 채 새롭게 테이머의 운명을 지니게 될 누군가를 제압하기 위해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신호를 본 다른 테이머들도 그곳으로 향했다. 유일하게 가지 않은 것은 현미였다. 그녀와 아구몬이 향한 곳은 다크바이러스의 신호가 나타난 장소였다.
3.
하늘이 높은 날,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베이지색 교복을 입은 소년이었다. 또래에 비해 키는 컸지만 마른 몸매는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소년은 급하게 뛰고 있었다.
“아악! 지각이라고!”
그는 주위를 살펴보지 않았다. 단지 뚫려있는 길을 갔다. 집으로 나오기 전 동생으로부터 들었던 시각은 여덟시 오십분이었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한 그는 허기짐을 느꼈음에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
그러던 중 머릿속에 반짝였다.
‘굳이 뛰어야 돼?’
어차피 지각할 것이었다. 이미 담임한테 첫날부터 찍혔을 것이라 여긴 그는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그리고 시내로 통하는 더럽고 좁은 골목길을 봤다. 썩 좋지 않아 보인 장소였고 눅눅했다. 왠지 더러운 냄새와 더불어 이상한 안개가 끼는 듯 했다. 그래도 소년은 그곳으로 갔다.
“왠 안개야. 아오. 요즘 재수가 없네.”
잔뜩 불평만 하던 중 왠지 주위가 조금 넓어진 것만 같았다. 단순히 기분탓이라기엔 넓은 평야에 와 있는 듯 했다. 소년은 느낌이 이상했다. 그걸 넘어서 기괴하기까지 했다. 왠지 이 곳에 있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서서히 걸음이 빨라졌다.
“꾸웩!”
미끌한 것이 발에 밟히자 달리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공포에 더위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추워졌다. 이미 골목길을 빠져나가도 남을 시간이었다. 죽음의 공포감이 느껴지는 듯 했다.
“워매, 워매, 워매, 워매.”
개구리의 울음소리같았지만 그것은 달랐다. 정확한 발음으로 뭔가가 울었다. 고기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몸이 떨렸다. 곧 안개가 사방에 깔려 온통 흰색으로 뒤덮혔다. 앞을 분간할 수 없게 되자 소년은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분명 자갈이나 쓰레기가 바닥에 있었을텐데도 전혀 긁히거나 흙먼지 따위가 묻어나지 않았다.
“뭐… 뭐야.”
축축하고 차가운데다 악취가 나는 이상한 액체. 점액 같은 것이었다. 녹빛 점액으로 더럽혀진 소년은 지금 이 상황이 영화에서나 볼 법한 상황임을 인지했다. 그럴수록 공포감이 하늘을 찌를 듯 올랐다. 엎어진 상태에서 고개를 살짝 들었다.
“으악!”
소년은 두 개의 안구와 눈이 마주쳤다. 놀란 마음에 바로 앉아 몸을 떨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워매, 워매, 워매.”
그런데 그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몸통에 입이 달렸고 그 안에 거대한 혓바닥과 치아를 내보이고 있었다. 달팽이를 연상시키는 눈알은 조금씩 소년에게로 다가왔다. 하나가 아니었다. 수많은 시선은 오직 하나에서 멈추고 있었다. 곧 검은 안개가 주위에 흐르기 시작했다.
‘꿈이야. 이런.’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느릿느릿 다가오는 것들이 점점 가까워지자 소년은 힘겹게 일어섰다. 온 몸이 떨리고 눈 앞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했다. 곧 시끄러운 괴성이 울렸다.
“워매! 인간을 먹는다! 워매!”
누가 할 것도 없이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소년은 무작정 뛰었다. 눈물로 앞이 가려 보이지 않았음에도 무조건 달렸다. 끈적하게 달라붙으려는 것들을 손으로 치웠다.
“젠장! 저리 가! 으윽!”
달리는 속도가 느려졌다. 초록빛의 더러운 것들이 자신의 몸에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팔을 휘둘러 떼어내려 했지만 그것들은 계속 달라붙었다.
“살려줘.”
그 때 어두운 안개가 초록빛 괴물들의 살을 잠식해나갔다. 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괴물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이건 둔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눈을 떳다. 괴물들의 살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검은 안개는 초록 괴물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이미 소년의 몸에 닿은 괴물들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몸의 일부가 검게 변했고 부식되어 갔다.
“뭐.. 뭐야.”
그것들은 점차 사라져갔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노란 머리를 한 여자와 노란색 괴물이 잠시 보였으나 어느새 안개와 같이 사라져있었다. 그가 있는 장소는 학교였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운동장임을 알아차리자 흙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온 몸에 힘이 풀려나가고 오줌이 찔끔 나올 것만 같았다.
“하아. 꿈인가?”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옷을 만져봤지만 축축한 기분은 없었다. 이게 무엇인가 싶었지만 그냥 잊기로 하며 유난히 조용한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문득 학교에 붙어있던 시계를 봤다. 일곱시 정각이었다. 소년은 허탈한 감정을 뒤로한 채 학교 입구에 들어섰다.